Lost Flower - 전두인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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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rt 댓글 0건 조회 4,703회 작성일 12-01-13 15:15작가명 | 전두인(Chun Doo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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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기간 | 2012-01-12 ~ 2012-01-19 |
초대일시 | 2012-01-12 PM 6:00 |
전시장소명 | 아트갤러리 유(ART GALLERY U) |
관련링크 | http://www.U-1KOREA.com 1644회 연결 |
Lost Flower - 전두인展
Chun Dooin Solo Exhibition
▲ 전두인
▲ 전두인
전시작가 : 전두인(Chun Dooin)
전시일정 : 2012. 01. 12 ~ 2012. 01. 19
초대일시 : 2012. 01. 12 PM 6:00
관람시간 : Open 10:00 ~ Close 19:00
아트갤러리 유(ART GALLERY U)
부산시 해운대구 중동 1510-1번지 5F
T. 051-744-0468
www.U-1KOREA.com
‘일상’의 현존과 ‘그림’의 현존
- 전두인 ‘꽃그림’에서 본 ‘작품’의 의미
김해성(부산대 명예교수)
요즈음의 도시 공간은 거대한 백화점이 쇼윈도처럼 유리공간이 되어 ‘감춤’의 치장보다 ‘드러냄’의 치장에 치우쳐 치장 자체가 이면보다 외면이 우선하고 있다. 실리적인 편의성보다 충동적인 장식성이 우선시되는 소비문화 현상에 우리들 모두 동화되어 작게는 스마트폰에서 크게는 도시의 유리창을 거울삼아 ‘드러냄’ 자체의 치장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그래선지 여성에게만 유일한 의무로 여겨지던 화장의 개념이 세대별로 단장, 분장, 변장, 위장, 포장으로 세분화되어 실제적으로 유리창이 되고 있는 고화질(HD을 자랑하는 TV 화면에 등장하는 얼굴들도 분장사가 만들어 준 얼굴을 디지털로 한번 더 포장해서 ‘생’ 얼굴과는 너무나 다른 외계인(?)의 모습으로 나타난 지도 오래되었다. TV 화면의 배경 장식용으로 등장하는 꽃들마저 그것이 방금 가져온 생화(生花)라 할지라도 조화(造化)로 변모되어 이에 익숙해진 우리들 또한 생뚱맞은 느낌을 갖지 않는다.
사실상 명화집을 뒤적이는 우리들은 고흐의 ‘해바라기’ 꽃그림을 보며 그 꽃을 생화 같다고 생각하지 않을뿐더러 생화와는 다른 작품 속의‘해바라기’를 새롭게 보지도 느끼지도 않는다. 고흐가 ‘그린’ 해바라기로 이미 알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점은 우리의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카페는 물론 진열장, 아파트 실내에 놓여 진 꽃들은 그 모두가 계절과 상관없이 시들지도 않는 불멸의 꽃 조화(造化)가 대부분이다. 알고 보면 고흐의 해바라기와 다를 바 없지만 고흐의 해바라기는 이상하게도 치장한 꽃으로 간주되지는 않는다. 아무튼 과거에도 그러했듯이 오늘의 미술 전시장에 여전히 꽃그림이 잦게 등장한다. 그리고 관람객 대부분 이러한 꽃그림에 ‘이쁘다’고 동감하지만 그 이상의 의미는 읽지 않는다. 긍금해서 제명을 기웃거리지도 않을뿐더러 돌아서서 꽃그림에 담긴 그림 아닌 ‘작품’으로서의 의미를 되씹어보지도 않는다. 역설적이지만 그래선지 꽃들의 초상(?)에 연연해하는 화가들은 ‘이쁘다’는 막연한 관념을 맹신하여 더욱 더 꽃들의 드러냄의 치장에만 몰두하는 것일까. 사진이든 실물이든 꽃들을 면전에 두고 보면서 그리는 화가가 있다면 그에게 있어 꽃은 ‘묘사’를 떠나 어떤 의미를 가질까. 소비문화에 걸맞게 드러냄의 치장을 공개적으로 앞세운 공장에서 만들어진 불멸의(?) 꽃인 조화(造化)와 다른 의미가 무엇일까. 화가는 물론 관람객 또한 ‘꽃그림’ 아닌 ‘작품’이라면 어떤 기대를 가지는 것일까. 이런 점에서 고흐는 물론 지난 시절의 화가들 또한 ‘이쁜’ 여인들만 그리지 않았듯이 ‘이쁜’ 꽃들만을 그림을 그리지 않았음을 새삼스럽게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철저하게 붓질로 그려지고 채색된, 그러면서 화질 좋은 TV화면보다 더 명료하게 근접해서 재현하듯 그려진 전두인의 꽃그림이 작품으로 치장을 넘어선 재현 아닌 ‘표현’으로 ‘그림’ 아닌 ‘작품’으로 의미를 갖게 되는 경계선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얼핏 보면 명료성을 앞세워 재현을 가장한 그의 꽃그림은 식물도감에 나오는 꽃과 유사할 수도 있지만 엄연히 다른 새로운 꽃이면서 꽃만이 아닌, 꽃이 주제가 된 풍경이다. 그의 꾸밈이 있는 듯한 실제와 다른 가장(假裝)은 일면 조화를 묘사하듯 보여지기도 하고 유심히 보면 꽃들과 함께 자리한 잎들과 줄기 또한 차지하는 크기만 다를 뿐, 단순히 꽃들의 배경으로 밀려난 조연급 역할을 벗어나 있다. 비록 꽃만큼 돋보이게 크게 그려내고 있지는 않지만 무성한 줄기와 잎들 또한 똑같이 명료하게 그려져 커다란 꽃들과 같이 평면적으로 노닐고 있다. 이것은 달리 말해 그의 그림을 잘게 쪼개 분할하더라도 그 조각 자체가 나름대로 유기성과 독자성을 갖고 꽃그림이라는 소재와는 무관한 그 자체로 새로운 무명의 그림이 되고 있다.
철저하게 붓질로 그려지고 채색된, 그러면서 화질 좋은 TV화면보다 더 명료하게 근접해서 재현하듯 그려진 전두인의 꽃그림이 작품으로 치장을 넘어선 재현 아닌 ‘표현’으로 ‘그림’ 아닌 ‘작품’으로 의미를 갖게 되는 경계선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얼핏 보면 명료성을 앞세워 재현을 가장한 그의 꽃그림은 식물도감에 나오는 꽃과 유사할 수도 있지만 엄연히 다른 새로운 꽃이면서 꽃만이 아닌, 꽃이 주제가 된 풍경이다. 그의 꾸밈이 있는 듯한 실제와 다른 가장(假裝)은 일면 조화를 묘사하듯 보여지기도 하고 유심히 보면 꽃들과 함께 자리한 잎들과 줄기 또한 차지하는 크기만 다를 뿐, 단순히 꽃들의 배경으로 밀려난 조연급 역할을 벗어나 있다. 비록 꽃만큼 돋보이게 크게 그려내고 있지는 않지만 무성한 줄기와 잎들 또한 똑같이 명료하게 그려져 커다란 꽃들과 같이 평면적으로 노닐고 있다. 이것은 달리 말해 그의 그림을 잘게 쪼개 분할하더라도 그 조각 자체가 나름대로 유기성과 독자성을 갖고 꽃그림이라는 소재와는 무관한 그 자체로 새로운 무명의 그림이 되고 있다.
전두인의 이번 전시에서 보인 근작은 화면 전체가 보다 전체적으로 밝고 돋보여서 그 구조적 유연성이 화가 자신이 의식적으로 고집하고 있는 ‘의미’라는 관념에서 자신도 모르게 벗어나고 있다는 점이 엿보인다. 묘사로 일관하는 화가일수록 마주하는 ‘일상’의 현존과 ‘그림’의 현존이 엄연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묘사 기교에만 안주하여 일상의 현존에 의존하는 길들임에서 벗어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이번 전두인의 꽃그림이 단순한 꽃그림의 차원을 넘어 ‘작품’의 의미를 갖게 되는 경계선의 접점에서 새로운 차원으로 지향하고 있다는 필자 나름의 판단은 어디에 근거하는 것일까. ‘일상’의 현존과 ‘그림’의 현존을 상호 침투시켜 그림만으로 가능한 새로운 현존으로 변화의 조짐이 엿보인다고 할까. 여기에는 자연스럽게 그림 속 붓질로 물감과 노니는 일상의 재현과는 다른 상상력이 동원되고 있다. 그것은 그 자신이 스스로 동의하든, 동의하지않든 관람자를 염두에 두는 의식적인(?) 의미와는 무관한 것으로 필자는 느껴진다. 보면서 그때그때 순간적으로 손놀림으로 그려내는 것은 생각보다 앞선 눈놀림의 몸짓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 꽃을 마주했던 눈놀림이 캔버스에 마주한 물감의 놀림에 의해 스스로 새로운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야말로 화가들이 진정으로 꿈꾸는 것이 아닌가. 현실적인 꽃은 배운 대로 가깝고 황홀해서 한 번의 길들임으로 통념처럼 벗어나기 힘든 위력이 있다. 그것을 벗어나는 길은 이미 알고 있는 꽃들의 이미지를 캔버스에 불러들여 물감으로 해체해서 새로운, 본 적이 없는 새로운 꽃들의 존재를 드러낼 때 화가에게는 물론 생경한 현존이 되는 것이 아닐까. 실상인즉 꽃그림과 다를 바 없이 역사가 오랜 조화조차 조화가 기대했던 불멸의 의미는 ‘재생’된 조화가 아닌 ‘창조’된 조화가 아니었던가.
천재 물리학자로 보다 과학철학자로 익히 알려진 토마스?쿤은 명료성에 근거한 실증주의는 물론 거기에 반기를 든 반증 가능성에도 이의를 제기하며, 진리처럼 가장 명료하다는 과학도 실상인즉 ‘잠시 유보된 오류’에 불과하지 않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런 점에서 전두인이 꽃작품에서 보인 명료성은 기법으로 보면 현재의 디지털 프린팅과 유사하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과는 달리 직접적인 몸놀림에 의한 붓놀림조차 감추고 있다는 점에서 실증은 물론 반증도 넘어선 화가만이 가능한 살아있는 직감이 느껴진다. 그래선지 토마스?쿤이 현대의 패러다임 변화에서 유난히 자연과의 조화를 역설하는 점이 새삼스레 필자로서 상기되기도 한다. 전두인의 꽃작품 저변에는 자연에 불과한 무의식적인 의식이 잠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선지 ‘꾸민 듯한 엄격한 것’ (명료성)에 보다 ‘은밀한 너그러움’(자연성) 그것이 앞으로의 전두인 꽃 작품에 상존하길 기대하는 것이 필자의 개인적 바람이기도 하다. -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읽지 않는 책 페이지의 갈피 속에 있다. 그 갈피야말로 화가들이 무의식중에 갈구하는 이정표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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