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oked and Raw / 나광호展 / NAKWANGHO / 羅鑛浩 / sculp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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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rt 댓글 0건 조회 4,510회 작성일 10-02-12 22:11
전시기간 ~
전시장소명

Cooked and Raw

나광호展 / NAKWANGHO / 羅鑛浩 / sculpture   2009_0826 ▶ 2010_0826

나광호_Filling_stainless steel, steel wire_700×500×500cm_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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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인천국제공항모빌아트공모전 대상

주최 / 인천국제공항공사

후원 / 롯데면세점_신라면세점_AK면세점_한국관광공사 면세점

에어스타 에비뉴_Airstar Avenue 인천시 중구 운서동 2850 인천국제공항 Tel. +82.32.741.5260 www.airport.kr

나광호 작업에 대한 에필로그(이 글은 나광호의 작품에 대한 분석과 비평이라기보다는 2년째 접어든 그의 작업이 이론적 토대에서 어떻게 전개되어 왔고 갈 것인지에 관한 에필로그 형식이다. 본문은 나광호 작품과 별개의 내용인 것처럼 서술되고 있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나광호의 작품을 의식하며 전개하였다.) ● 우리는 많은 부분 어릴 적 즐거움을 잃어버렸다. 병원놀이, 소꿉장난, 다방구……. 이름은 모르지만 옆집에 살던 여자아이와 빨간 벽돌가루와 모래를 가지고 저녁 준비를 하던 때가 기억난다. 또 코 밑에 마른 콧물을 부치고 술래잡기를 하던 동네 친구들이 생각난다. 이렇게 추억을 회상하는 우리의 모습은 어느새 셈을 할 줄 아는 성인이 되었다. 뭔가 아쉽고 많이 잃어버린 것 같다. 어린 시절 우리는 연필 한 자루나 찰흙 한 덩이만 있으면 그저 좋았다. 찰흙 한 덩이로 내가 좋아하는 로버트 태권브이를 만들었고 연필로 엄마의 얼굴을 그렸다. 나름 비슷하게 그렸는데 그게 그렇게 재미있을 수 없었다. 기다란 연필을 움켜지고 있는 아이의 몽당손에 우리가 따라 할 수 없는 뭔가가 있다면 그것은 순수한 즐거움일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인간의 내부에는 흉내 내고 표현(모방)하려고 하는 본성이 있어서 감정의 환기(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킨다고 하였다.(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시학, 문예출판사, 2000, 서울, p.35) ● 다르게 말하면, 아이의 드로잉은 지식을 습득하는 학습이며 동시에 쾌다. 원래 미술(Art)은 그렇게 쉽고 순수하게 즐거운 것이다. 예술의 행위가 되는 드로잉은 형태를 모방한다. 특히, 얼굴의 드로잉은 다른 어떤 신체기관이나 사물과도 구별되는 순수함에서 나오는 동경이다. 그만큼 얼굴은 무궁한 감정이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감정의 소산은 미(美)며 미를 다루는 학문은 예술이다.(헤겔(G. W. F. Hegel), 헤겔 미학I, 나남출판사, 2001, 서울, p.219) ● 긁고 채우거나 그리는 과정은 행위를 수반하는 순수한 표현이며 참 좋은 학습 방법이다. 단적으로 그것은 관찰이다. 처음은 손을 통한 관찰이며 다음은 눈을 통한 관찰이다. 아이들은 눈보다는 촉감에 많이 의존한다. 아이가 엄마의 젓을 빨고 손으로 사물을 만지는 행위를 보라. 그렇기 때문에 보다 더 본성에 가깝다. 눈의 관찰은 좀 더 고상해진 방식으로, 궁극의 예술(미술)은 비가시성을 가시화 하는 것이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가 언급한 시각적인 촉감(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The Visible and the Invisible, Northwestern University, 1968, p.133)이 말해주듯이 손과 눈의 관찰은 예술작품을 반추하는 데 있어서 흥미 있는 카테고리다. 이 두 가지의 관찰이 서로 교차하게 될 때 어떤 공간이 채집되듯이 형성되며 평평해진다. 마치 화석처럼 이미지든 글자든 알 수 없는 드로잉이든 간에 정면성을 갖고 평평해진다. 어떻게 보면 기호로도 읽혀질 수도 있겠지만 아직은 순수하게 압착된 드로잉 이미지에 불과할 뿐이다. 왜냐하면 손과 눈 사이의 시간의 틈은 매우 비좁기 때문이다. 시간은 보는 것으로 읽어내게 하는 내러티브를 발생시킨다. 하지만 손의 드로잉에 곧바로 시선이 맺혀지니 그렇게 사고할 여유가 없는 것이다. 사고의 여유는 인류가 최초로 타락하도록 한 인식의 열매다. 인식의 열매는 호기심과 의심에서 나온다. 그것은 봄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기서 관찰은 시간의 틈을 벌리게 하는 역할을 하는데 그 호기심과 의심은 또한 예술을 생산해 냈다. 예술의 범주에서 시선(봄)은 더 이상 범죄가 아니다. 촉각(손)으로 예술작품을 감상할 수 있게 하는 실재를 재현한다. 따지거나 재지 않으며 본래의 감정을 고양시킨다. 이렇듯 두 가지의 시선은 낙서, 채집과 같이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물리학 박사과정 수업시간에 칠판에 판서된 그래프며 공식, 원소기호들은 어린 아이의 손에서 한낮 낙서에 불과하다. 글씨도 마찬가지고 형태를 갖고 있는 이미지도 역시 그렇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배설행위로 보았는데 뭐 어찌되었든 낙서를 통해서 오는 쾌는 꽤나 순수하다. 거기엔 머리 아픈 논리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채집의 경우를 봤을 때, 이것저것 장난감으로 수많은 모양들을 한 상자에 담아둔다. 실제로 움직이는 자동차가 아닐지라도 실제 자동차처럼 믿고 가지고 놀기 위해서다. 그러기 위해서 원하는 이미지들은 소유되어야 하며 자신만의 장소에 가져다 놔야 한다. 이 소유의 배후에는 인간의 욕망이 있다. 이 욕망은 삶의 의지요, 욕심과는 구별된다. 무엇을 채울 것인가. 아이에겐 모든 대상이 장난감과 같은 놀이의 대상이겠지만 어떤 어른들에게는 그 놀이의 대상을 흥미롭게 차용하기도 한다. 부모나 교사는 어린이의 행위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운다. 겉으로 보기에 그들은 아이들을 가르치고 양육해야 하는 보호자로 서있지만 부모가 자녀를 낳은 근본적인 이유는, 교사가 가르치기 위해서 학생들 앞에 선 것은 그 순수했던 동경심과 잃어버렸던 즉흥적 감각을 되살리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존 듀이의 이론에 의하면 이것은 경험으로서의 예술로 일상에서 얻은 경험과 미적 경험은 유기체적 성격을 띠며 연속성을 갖고 있다.(존 듀이(John Dewey), 경험으로서의 예술, 책세상, 2003, 36쪽) ● 아이들이 학습을 하면서 놀이를 하듯이 즐거워하는 것은 교사가 아이를 가르칠 때 오는 쾌감과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이런 측면에서 예술에서의 미적 경험은 우리에게 순수한 즐거움을 안겨다 주게 한다. 즉, 미적 경험을 통하여 세대와 성별을 넘어설 수 있고 작가와 관객의 소통을 가능하게 한다. 소통은 매우 큰 범주에 속한다. 작품을 통하여 참여자들의 소통을 설명하기도 하고 작가와 관객 혹은 대중성으로 소통을 해석하기도 한다. 유아적 드로잉이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까닭이 누구나 유아기의 시절을 거쳤다는 사실이다. 이차 성징기에 접어든 청소년은 오십 대가 된 부모님을 이해할 수 없다. 반면 부모님들은 그들을 이해할 수 있으나 그때를 망각해버리고 자신의 욕심으로 자녀를 보려고 한다. 이렇게 소통은 이해와 순종이 중요한데 이해는 위에서 아래고 이동하는 것이고 순종은 아래서 위로 이동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술에서 언급되는 소통은, 작가가 관객들에게 자신의 작품이 가치가 있다고 강요하는 것은 지식인의 횡포요, 관객들이 뭔지도 모르고 수궁하며 이해했고 감상했다고 하는 것 역시 무지목매의 처사로 이와 동일하다. 소통에는 미적 범주로 윤리적인 측면이 고려된다. 최소한 작가는 자신의 작업에 진정성을 잃어서는 안 되며 관객에게 있어서는 미적 교육이 필요하다. 예술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은 작가에게 있어서나 관객에게 있어서나 체험이다. 캔버스라는 화면은 그러한 체험이 고착된 공공장소(공공미술)다. 어른이 어린아이의 드로잉을 사모하여 그 드로잉을 카피하였다 하더라도 공공의 장소이기 때문에 참여자 모두가 순수한 즐거움을 공유할 수 있다. 특히, 판화의 에디션은 공공장소로 손색이 없다. 누구나 쉽게 참여할 수 있고 누구나 쉽게 베낄 수 있다. 조금만 기술을 연마하면 딱딱하지 않고 회화적으로 그린 것처럼 만들 수 있다. 따라서 판화가 갖는 장소성은 한편으로 공공성과 대중화로 읽혀진다.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이 판화적 속성이다. 판화적 속성은 찍는다는 데 있다. 찍는 것은 층(layer)을 갖는다. 다르게 말하면, 여러 개의 평면성이 층을 이루고 있는 속성을 갖고 있다. 어떤 평면성은 물성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고 또 어떤 것은 이미지의 실체와 그림자를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와 다른 속성으로 판화는 원본 대신 다양하게 생산하게 하는 에디션을 소유할 수 있게 만든다. 작가는 유아적 감각을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고 다양한 시선을 잇게 할 수도 있다. 더불어 화면에 무엇을 채우고 무엇을 넓힐 것인지 고민할 수도 있다. 그 이유는 자유스럽기 때문이다. 원래 판화가 틀에 갇혀진 이미지를 재생산해 내는 것으로 보이지만, 판화적 속성은 자유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시작하며 우리는 많은 부분 어릴 적 즐거움을 잃어버렸다고 기술하였다. 그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사라진 것이 아니라 우리 머리 위에 떠서 우리에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것만큼은 바로 지금의 우리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예술에 있어서 즐거움은 현실을 벗어나있으면서도 현실에 귀속될 수밖에 없는 입장에서 발견된다. 그것은 역사적 아방가르드와 네오아방가르드와의 구분으로 설명된다. 쉬운 예로 뒤샹이 전시장에 사다 논 변기를 후대 예술가들이 계속 써먹는 것은 다시 역사적 아방가르드로 소급되어 발 없는 유령과 같이 작품 주변을 맴돌고 그 권위에 호소하며 상품화 시키는 꼴이다. 가장 상품화에 동조한 앤디워홀의 작품이 그렇게 싸지 않은 이유는 이미 미술사적 권위로 한 역사의 한 장을 장식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분명, 작품은 상품이 될 수 있다. 반대로 상품이 작품화 될 수는 있어도 작품일 수는 없다. 한국에서는 소위 팔리는 작가와 안 팔리는 작가로 구분하기도 한다. 점잔은 용어로 아트페어용 작가 미술관용 작가로 구분한다. 이러한 구분은 누가 만든 것일까. 미술의 이상한 헤게모니가 어쩔 수 없는 미술 판을 움직이고 있지 않는가. 무엇이 되었든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기가 힘들다고 말을 건넸던 나광호 씨의 말이 기억난다. 그도 이 미술현장에 발을 들여놓았으니 꽤나 마음이 설렜나 보다. ■ 김용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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